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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방송계 종사자의 고백
신입시절 나는 선택받아야 할 '을'
"나랑 자야 집에 갈 수 있다"며
내 어깨 잡고 돌려세우려는 '갑'
소리 지르며 무작정 내달려 도망

갑들과 싸우기엔 불리한 방송계
항의해봤자 미친년 독한년 취급
참고 넘기며 쿨한 척 괜찮은 척

자포자기 심정 남의 아픔도 침묵
남자들 뒷담화에 맞장구 죄책감
익명이라도 조금씩 목소리 낼 터 
"성폭력 가해자들, 벌벌 떨기라도 했으면"


■ 나는 피해자입니다
“신입 시절이었다. 악,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난 선택받아야 하는 을이었고, 그는 나를 선택해줘야 하는 갑의 위치였다. 계약을 위해 만난 자리에서 그는 반주한다며 술을 시켰다. 권하는 몇 잔을 마셨을 뿐, 난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는 연거푸 자작을 하더니 “그 가슴 다 니 거냐”는 등 언어 추행을 일삼았고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나는 술이 취하면 섹스를 해야 해. 섹스를 하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질 않아. 나랑 섹스해야 내가 집에 들어가.” “무슨 소리 하시는 거냐”며 일어섰지만 이내 따라와 내 어깨를 잡고는 강압적으로 돌려세우려고 했다. 소리를 지르며 무작정 내달렸다. 애써 잊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문화방송> 피디 성추행 사건을 접하면서 온몸이 떨렸던 그때의 공포가 다시 밀려왔다. 어쩜 이 바닥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걸까.” 

■ 나는 방관자였습니다
“그렇게 괴로우면서 왜 문제제기 하지 않았느냐고? 이런 일들이 처음이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대부분 성추행은 업계에 발 디딘 지 얼마 안 된 이들을 상대로 벌어진다. 지금처럼 연륜과 나이가 쌓였다면 몰래 녹취 버튼을 누르거나 고소하겠다며 협박이라도 했겠지만, 그때는 너무 갑작스럽게 닥친 일들에 그저 집에 와서 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을’ 중에서도 ‘을’인 당시의 내가 갑들과 싸우기에는 이 바닥의 구조는 여러 가지로 여자한테 불리했다. 작가나 스크립터, 외주제작사 프로듀서 등으로 일하는 여자들이 방송 콘텐츠 제작 과정의 권력관계 속에서 권력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하청에 하청을 거듭하는 비정규직 백화점이라 ‘갑’이 한 곳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방송사에서 을인 외주제작사는 또 다른 하청업체에는 갑이 된다.”

■ 나는 가해자입니다
“그래서 나는 방관자이고 그러했기에 가해자가 됐다. 문제제기를 해도 결국 피해를 보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남의 아픔에도 침묵했다. 한 여자 스태프가 성추행을 당했고,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피해자를 욕할 때, 그 틈에 껴서 영혼 없이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였거나 목소리를 내도 지켜줄 보호막이 있었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라고 자위해도 내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는 죄책감
을 씻을 수 없다.”

“과연 우리나라에도 외국처럼 ‘미투’ 운동이 거세게 불 수 있을까? 나는 좀 회의적이다. 할리우드와 달리 입을 여는 유명 배우들이 없고, 아직은 간부 다수가 남성이라 성추행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각 분야의 협회 간부들도 대부분이 남성들이며 그중엔 본인이 성폭력에 휘말린 이들도 있다. 어쩔 수 없는 구조를 당장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책하기에 앞서 익명이라도 조금씩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힘없는 보조 작가, 막내 스태프들을 위해 나라도 싸워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고 있다. 한두마디씩 보태진다면, ‘적어도 잠재적 가해자’들의 입과 손을 묶을 수는 있을 것이다.”출처 -한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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